요즘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만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방증(傍證)한다고 볼 수 있겠다. 부끄러움은 선비가 되고 사람이 되는 중요한 덕목이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선비고 사람이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당연히 선비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양심이 이미 욕심에게 완전히 잠식(蠶食)되어 부끄러워하는 기제(機制)가 작동을 멈추어버렸으므로 행동에 통제 장치가 망가지게 된다. 그러니 무슨 행동을 하든지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게 된다. 그래서 못할 일이 없게 될 것이고 종국(終局)에는 차마하는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된다. 어찌 보면 세상에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사람 사는 세상이 유지되기가 정말로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사람들이 마음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기제가 작동하도록 욕심에게 잠식된 양심을 사람들이 회복해내어야 할 것이다. 양심을 회복하는 길은 부끄러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일깨우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염치(廉恥)라고 하였다. 선현들이 말씀하신 염치의 몇몇 구절을 약석(藥石)으로 삼아서 오늘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군상(群像)들을 각성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염치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를 보면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염치를 이전까지 거론한 수많은 칼럼이나 글을 보면 아마도 염치는 사람이 가지기 가장 어려운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쉽게 갖출 수 있는 덕목이라면 그렇게까지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여전히 많이 거론하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래(古來)로 염치를 얼마나 강조했는지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몇 가지 예를 보자. 먼저 우리나라의 대표적 부끄러움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윤동주(尹東柱:1917-1945)의 경우를 보자. 시인 윤동주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서시(序詩)」의 한 대목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읊고 있다. 이외에도 부끄러움에 대한 작품은 많다. 윤동주 시인의 부끄러움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대체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본능 가운데에서 가장 윤리적이고 신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양심의 부끄러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양심의 부끄러움을 바탕으로 구축한 시세계가 윤동주 작품의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윤동주 시인의 여러 작품을 읽으면서 부끄러움의 본질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맹자는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편에서 “사람은 부끄러움(염치)이 없어서는 안되니 부끄러움(염치)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치욕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人不可以無恥.無恥之恥.無恥矣)”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그러니 만약 부끄러움이 없다면 도저히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진실로 부끄러워하게 된다면 앞으로 치욕스러운 일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로 맹자는 부끄러움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또한 맹자는 “부끄러움이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크다. 기변(機變-임기응변)의 공교로운 짓을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쓰는 바가 없다. 부끄러워하지 않음이 남[正常人]과 같지 않다면 어느 것이 남과 같은 것이 있겠는가?(恥之於人.大矣.爲機變之巧者.無所用恥焉.不恥不若人.何若人有.)”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가치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임기응변(臨機應變)과 변사(變詐-변덕스럽게 이랬다저랬다 함)의 교묘한 짓을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적용하는 곳이 없다. 따라서 정상인처럼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정상인과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예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맹자의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염치에 대해 비교적 이론적으로 정치(精緻)하게 말한 자료로는 제나라의 재상인 관중(管仲)이 지은 관자(管子)를 들 수가 있다. 관자(管子)·목민(牧民)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나라에는 네 개의 벼리가 있는데 벼리 하나가 끊어지면 기울어지고 벼리 두 개가 끊어지면 위태롭고 벼리 세 개가 끊어지면 엎어지고 벼리 네 개가 모두 끊어지면 멸망하게 된다. 기울어진 것은 바로잡을 수가 있고 위태로운 것은 편안하게 할 수가 있으며 엎어진 것은 일으켜 세울 수가 있다. 그러나 멸망된 것은 다시 조치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네 개의 벼리라고 말하는가? 첫째는 예이고 둘째는 의이며 셋째는 염이고 넷째는 치이다.(國有四維,一維絶則傾,二維絶則危,三維絶則覆,四維絶則滅.傾可正也,危可安也,覆可起也,滅不可復錯也.何謂四維,一曰禮,二曰義,三曰廉,四曰恥.)”라고 하였다. 예(禮)는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절도가 있어서 사람들이 함부로 계급이나 한도를 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의(義)는 법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으로 망녕되게 스스로 나아가 구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염(廉)은 선악을 분명하게 관찰하여 악행을 가리거나 꾸미지 않는 것이고 치(恥)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니 사악하고 망녕된 것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염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청렴이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반적인 청렴에다 선악을 분명하게 관찰하여 나쁜 행동은 조금도 엄폐(掩蔽)하거나 꾸며서 드러나지 않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네 가지 벼리는 나라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되는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 가운데 바로 염치가 두 개의 벼리에 해당하니 염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가 있겠다. 이 네 가지 벼리가 절대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야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유지될 수가 있으니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이를 철저하게 인식하고 행동으로 옮길 일이다. 또한 순자(荀子)의 「수신(修身)」편에 보면 “염치가 조금도 없으면서 음식만 축내는 사람은 곧 아주 악질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형벌을 가하여 사형에 처해도 가능하다 할 것이다.(無廉恥而嗜乎飮食,則可謂惡少者矣.雖陷刑戮.可也.)”라고 하였다. 염치라고는 조금도 없으면서 귀한 음식을 축내는 사람은 아주 악질적인 사람으로 이러한 자들은 형벌에 처하여 죽여도 좋다고 아주 과격한 발언을 하고 있다. 순자의 이 기준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여 에외를 두지 않는다면 아마도 온 나라가 텅 비게 될 것이다. 그만큼 우리 주위에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탄식할만한 일이다. 심지어 송사(宋史)·채원정전(蔡元定傳)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혼자 걸어갈 때에는 내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혼자 잠을 잘 때에는 덮고 자는 이불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獨行不愧影,獨寢不愧衾.)“라고. 참으로 기가 막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 혼자 길을 걸어가면서 땅바닥에 비친 내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게 걸어가야 하고 심지어 나 혼자 잠을 잘 때에 덮고 자는 이불을 보고 그 이불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는가를 되돌아봐야 한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성찰(省察)인가? 그림자는 달빛이 없는 밤이나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지 않는 이상 햇빝이 있으면 언제나 나를 따라다닌다. 거의 언제나 나와 동반(同伴)한다고 보면 되겠다. 내가 하는 것을 어김없이 그대로 재현해 보여준다. 그러니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한다면 행동을 항상 똑바로 해야 한다. 밤에 덮고 자는 이불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렇게나 행동한다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은 몰라도 이불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보고 있다. 이불에도 눈이 있다고 생각하라. 그러면 이불에 부끄러운 행동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비단 그림자나 이불만이 아니고 이 우주 공간에 있는 모든 대상에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고전에 나타난 염치의 몇몇 실례를 살펴보았다. 모두가 염치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는 듯이 염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염치를 마치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몰염치(沒廉恥), 파렴치(破廉恥)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고도 이 세상이 유지된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아마 익지서(益智書)에서 말하는 ‘악의 두레박’이 다 차지 않아서일 것이다. 만약에 악의 두레박이 가득 찬다면 천벌(天罰)을 면치 못할 것이다.[惡鑵.若滿.天必誅之.] 이런 사실을 안다면 자신의 나쁜 행동으로 악의 두레박이 차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각심(警覺心)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천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양심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다면 악의 두레박을 채우는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따라서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게 된다. 그런데 만약 끝내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그는 선비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하루빨리 욕심에 잠식되어 거의 사라져버린 듯한 양심의 한 조각이라도 억지로 되살려서 부끄러움의 기제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부끄러움 회복운동에 나서야 우리 사회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것이다. 그래야 선비도 되고 사람도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해도(畢竟) 필경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우리 공동체에서 퇴출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독소가 퍼져나가 다른 사람의 양심을 무치(無恥)로 물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어 훌륭한 선비도 되고 제대로 된 사람도 되어서 사람사는 세상, 살맛이 나는 세상을 만들어보자. 출처_영주인터넷방송 <저작권자 ⓒ 김포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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